분당서울대학교병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의 뿌리를 이어받은 서울대학교병원이 처음으로 건립한 분원이다. 2003년 3월 1일 병원 설립 및 교직원 임명장 수여를 진행하고, 5월
진료를 개시했다. 이후 6월 개원식과 함께 공식 개원하여 2023년 창립 20주년을 맞았다. 개원 이래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듭하며 국내 의료산업 발전을 이끌었고, 나아가 글로벌 초일류병원으로서
위상을 드높였다. 이러한 성과를 거두기까지 무수히 많은 위기를 넘어야 했고 시련을 극복해야 했다. 교직원 모두의 열정과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서울대학교병원이 분원 설립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말이었다. 그 이전에도 분원의 필요성이 제기되기는 했으나 구체적인 논의로 이어지지 못했다.
1989년 당시 서울대학교병원은 한계에 이르고 있었다. 개원 이래 꾸준히 연구 및 진료시설을 확충해 왔기에 서울시 종로구 연건동 부지는 더 이상의 인프라가 들어설 여유 공간이 없었다. 일반병상
이용률은 100% 이상이었고, 응급실 대기자가 평균 60명을 넘어섰다. 입원하기 위해서는 최소 2~4주를 기다려야만 했다. 진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의학교육 연구기관으로서도 아쉬움이 있었다.
입원환자의 30% 이상이 암 환자였고 심장병 등 특수질환 환자에 치중되어 다양한 분야의 연구와 교육이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완전히 포화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분원 설립의 목소리가 나왔다.
시대적 상황과 사회적 분위기도 서울대학교병원의 분원 설립을 요구하고 있었다. 소득수준의 향상과 의료과학의 발달로 국민의 평균수명이 늘고 노년층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고 있었다. 노인성 질환자도
당연히 증가하는 추세였다. 머지않아 닥칠 고령화 사회에 대비하여 노인건강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국가적인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서울대학교병원은 급변하는 의료환경에 대응하고 국내
의료산업을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감과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이처럼 서울대학교병원 분원 설립은 대내외적 차원에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요청이었고, 그 당위성이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1989년 12월, 서울대학교병원은 건설교통부로부터 분당에 분원을 설치해 달라는 요청을 받으면서 이러한 목마름을 해소할 수 있는 계기를 맞았다. 정부는 1989년 수도권의 기능을 분담하고 부동산
가격안정을 목적으로 제1기 신도시 사업을 발표했다.
분당과 일산, 평촌, 중동, 산본을 신도시로 조성하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신도시의 대규모 주택단지를 조성할 때 가장 필수적인 인프라가 바로 종합병원이었다. 정부는 분당신도시에 종합병원급 2~3개
의료기관을 유치하는 방안을 고려했고, 서울대학교병원에 분원 설치를 요청한 것이다. 서울대학교병원은 정부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한 끝에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급변하는 국내 의료환경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새로운 인프라를 수용하기 어려운 연건동 부지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정부의 제안을 수락한 후 곧이어 분원 건립 타당성 평가와 건립계획안을 준비했다. 정부도
설립인가는 물론 대폭적인 재정지원을 약속하며 분원 건립에 힘을 실어주었다.
분당은 분원을 설립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서울대학교병원은 분원 건립을 구상하면서 염두에 둔 입지가 있었다. 서울 중심지를 벗어나되 중추적 연구·진료시설로서 본원의 인력을 활용할 수
있고, 환자 편의도 높으며, 인구 밀집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분원을 설치하기를 희망했다. 또 지방에서 후송되는 응급환자들이 상습적으로 교통이 정체되는 서울 도심까지 가지 않아도 될 수 있도록
고속도로와 인접한 곳에 응급 및 외상환자를 전문으로 치료할 수 있는 응급진료체계를 갖추기를 바랐다.
그런 점에서 분당은 최적의 입지였다. 경부고속도로 인근에 자리한 도로 교통의 요지로 지방에서 오는 환자가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어 지역주민은 물론 경기 이남의 지방 환자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
환자의 입장에서도 멀리 서울까지 가서 몇 달씩 기다리지 않고 서울대학교병원의 우수한 의료 혜택을 누릴 수 있으니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모두의 관심과 기대 속에 분원 건립을 위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설립 허가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보건사회부는 의과대학 부속병원의 난립을 방지하고 지역 간 의료기관의 적정한 배치를 목적으로
‘의과대학의 부속병원은 해당 의과대학이 소재하는 시도 내에만 설치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이는 서울대학교병원의 분원을 서울 안에서만 설치할 수 있고 경기도인 분당에 지을 수 없다는
의미였다.
서울대학교병원은 분원 건립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여러 차례 설명하고, 설립을 허가해줄 것을 설득했다. 다행히 1990년 5월 보건사회부가 보내온 의견서는 그동안의 우려를 말끔히 해소해 주었다.
분당지역이 수도권과 연계하고 있고, 최신의 설비와 우수한 의료인력을 갖춘 의료기관이 들어서 지역 주민의 3차 진료를 담당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내용이었다. 더불어 의과대학 부속병원 설치 지역 제한
규정을 의과대학이 소재하는 진료권 내로 완화할 계획이 있음을 밝히고, 서울대학교병원 분원을 설치하는 데 문제가 없음을 확인해 주었다. 문제가 해결되면서 서울대학교병원 분원 건립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1991년 11월 1일 서울대학교병원은 분원의 명칭을 가칭 ‘분당병원’으로 부르기로 하고, ‘분당병원 건립준비위원회’를 설치했다. 가장 먼저 분당병원의 건립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임상
각 과의 진료과장 및 의국장, 기초교실 주임교수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의견을 수렴하고, 장기발전 워크숍을 개최했다. 이를 통해 세계적인 수준의 의학 발전을 위해 별도의 연구시스템과 시설
확충이 필요하며, 본원의 진료상 문제점을 해결하고 향후 질병 추이에 대응하기 위해 별도의 진료센터를 건립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분당병원은
‘서울대학교병원의
설립 목적인 교육, 연구 및 진료에 부합되는 특수병원으로서 특수질환에 관한 진료를 통하여 의료인의 교육을 수행할 뿐 아니라 세계 최첨단 연구를 통하여 의학발전의 산실이 된다’는 설립 목적을 수립할
수 있었다. 본원인 서울대학교병원 입지만으로는 특히 노인병 및 응급외상, 재활요양 등의 분야를 다룰 수 없었으므로 분당병원의 기능을 노인병센터, 응급외상센터, 재활요양센터 및 의학연구소로 정립하여
공공의료병원의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기로 했다.
규모는 11만 2,397㎡(3만 4,000평)의 부지 위에 노인병센터 200병상, 응급외상센터 200병상, 재활요양센터 100병상 등 총 500병상으로, 1998년 완공을 목표로 했다. 예산은
부지매입비 340억 원, 건축비 200억 원, 의료장비 105억 원 등 총 690억 원이었다.
1991년 12월 서울대학교병원은 25차 이사회에서 원안대로 분원을 건립하기로 결의했다. 서울대학교병원 분원 건립의 초석이 놓이는 순간이었다.
정부가 분당에 분원 설립을 제안하면서 제시한 위치는 현재의 장소가 아니었다. 첫 후보지는 이미 조성이 끝난 상가지역 내의 3차 진료기관 의료시설 용지로, 3만 744㎡(9,300평)의 규모였다.
이는 서울대학교병원이 구상하고 있던 분원의 목적과 기대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먼저 상가지역은 교육·연구병원의 기능을 수행하기에 여러모로 적합하지 않았으며, 규모도 노인병센터와 응급외상센터 및
관련 연구시설을 설치하기에 지나치게 협소했다. 이미 상가로 조성한 뒤라 평당 원가도 다른 지역보다 높아 재원 확보에 부담이 되는 점도 발목을 잡았다. 병원의 목적과 환경, 규모, 경제성 등을 두루
고려할 때 이미 조성된 상가보다 자연 상태의 넓은 부지를 공급받아 목적과 기능에 적합하도록 조성하는 것이 더 바람직했다.
마침 그 즈음에 분당신도시를 예정보다 확대 개발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분당신도시 추가개발사업지구 지정계획이 승인되었다. 1991년 1월 토지개발공사는 서울대학교병원의 뜻을 반영하여 오늘날
분당서울대학교병원이 위치한 추가개발사업지구 내 11만 2,397㎡(3만 4,000평) 규모 부지를 새 후보지로 제시했다. 이곳은 인구 밀집 지역에서 떨어진 한적한 곳으로 사방이 자연녹지로 둘러싸여
있었다. 뒤로는 불곡산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앞으로는 탄천이 유유히 흐르는 배산임수 지역으로 심신이 지친 환자들이 치유하기에도 좋은 환경이었다.
같은 해 5월 서울대학교병원은 임시이사회를 소집하여 변경된 후보지가 입지, 규모, 예산 등을 고려할 때 적합하다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다음은 예산 확보였다. 분당병원 건립에 드는 막대한 자금을
자체적으로 충당하기란 무리였다. 정부의 자금 지원이 절실했다. 그러나 당시 경제기획원은 신규사업을 일절 허용하지 않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어, 분당병원 건립을 수용하여 출연금을 지원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기획예산처를 수시로 찾아가 설득했다. 예산안 국회 통과를 앞두고 노관택 당시 서울대학교병원 원장을 비롯한 집행부가 민주자유당 당사를 찾아 김영삼 총재에게 협조를 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1991년 12월 국회로부터 정부 출연금 예산 25억 원을 승인받을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서울대학교병원 의료시설부지 지정고시가 이루어졌고, 부지매입에 관해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부지매입을 두고 밀고 당기는 상황이 한동안 이어졌다. 토지개발공사는 도시설계 좌표면적이 확정되며 당초 11만 2,397㎡에서 12만 2,387㎡으로 평가면적이 늘어났다며 감정가 기준 연
10% 할부이자 적용을 요구했다. 이자만 100억 원이 넘었고, 분양가도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수익사업에만 치중할 수 없는 공공병원이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끝내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결국 1992년 11월 관리회의를 소집하여 690억 원이던 사업비 규모를 1,134억 원으로 수정했다.
1991.02.10 초기 분당서울대학교병원 부지 전경
이 같은 우여곡절 끝에 1992년 11월 30일 서울대학교병원은 토지개발공사로부터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F3-17번지 불곡산 기슭의 12만 2,387㎡ 부지를 456억 원에 구입했다. 5년 분할납부, 이자 연 10%의 조건이었다. br 1993년 3월 서울대학교병원은 분원의 본격적인 운영계획과 대책을 수립할 전담 조직으로서 ‘분당병원 건립추진대책반’을 구성했다. 4월에는 분당병원의 기본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장기발전계획 워크숍 및 합동회의를 개최했다. 이를 통해 ‘서울대학교병원 본원과 분원은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도록 역할을 분담하고, 노인병센터 및 재활요양센터, 응급외상센터 기능을 특성화한 500병상 내외의 종합병원(General Hospital)으로 한다’는 분원의 기본원칙을 재정립했다. 같은 해 9월에는 한국의료관리원과 분당병원 건립계획 및 운영계획 연구용역 계약을 체결하고 건립계획을 다각도로 검토했다. 이 과정에서 신축 중이거나 신축 예정인 종합병원과 노인 관련 병원의 자료를 수집하고 보건사회부 노인복지과 정책방향과 떠오르는 실버산업의 트렌드를 조사하여 참고로 삼았다.
1993년 12월 서울대학교병원 분당병원 건립추진대책반은 분원 건립 부지이용계획 현상설계를 공모했다. 이때 내건 조건은 ‘병원의 발전 가능성과 확장성을 고려하는 동시에 자연과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룰
것’이었다. 근린공원과 자연녹지로 둘러싸여 있고, 신시가지가 한눈에 보이는 우수한 경관이 돋보이는 지리적 장점을 십분 살리려는 의지였다. 1994년 2월, 공모에 참여한 7개 사 가운데
우일종합건축사무소가 제출한 공모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고, 부지조성 설계 및 건축설계 계약을 체결했다. 8월에는 분당병원 건립추진대책반을 확대하여 ‘분당병원 건립추진본부’를 발족하고 선진 사례를
조사하기 위해 미국과 일본으로 견학단을 파견했으며, 12월에는 부지조성공사를 시작했다.
1995년 2월 분당병원 건립추진본부는 병원 내에 설계회사 현장사무소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기본설계 작업에 들어갔다. 단순히 기능 위주에서 벗어나 기능에 적합한 다양하고 식별성 있는 형태의 디자인,
자연채광 및 색채까지 고려한 실내환경, 호텔과 같은 서비스와 부속시설을 실현할 수 있는 인간적인 병원을 건립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분당병원 건립추진본부는 매주 전문가를 초청하여
관련 강의를 들을 정도로 열정을 쏟았다. 그러나 배치도(Block Plan)에 관해 논의하면서 문제점이 하나둘 드러났다.
초기에 계획된 500병상(일반병상 250병상)의 노인성 전문종합병원으로는 대학병원 및 3차 진료기관으로서 역할을 다하기가 어렵다는 문제였다. 병상을 늘리고 증축하려면 설계 및 공사비용의 추가 투입이
불가피한 상황,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한편, 분당병원 건립은 의도하지 않게 법 시행령을 개정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95년 1월 부지조성 공사를 완료한 후 골조공사 발주를 위한 건축허가 신청을 눈앞에 두고 새로운 난관을 만났다.
수도권정비계획법상 과밀억제권역 내 정부출연기관의 사무소는 인구집중 유발시설로서 건축주가 과밀부담금(공사비의 10%)을 납부하도록 했는데, 분당병원이 이에 해당된다는 것이었다. 성남시가 분당병원을
정부출연기관의 사무소로 해석하여 생긴 일로, 건축허가를 받으려면 약 100억 원에 달하는 과밀부담금을 납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분당병원 건립추진본부는 법률 해석에 문제를 제기하며 건설교통부를
설득했다. 그 결과 1995년 12월 ‘공공법인에서 설치하는 의료시설을 규제대상에서 제외한다’는 예외조항이 담긴 수도권정비계획법 시행령 개정안의 입법예고를 이끌어냈다.
1995년 5월 서울대학교병원은 제34차 임시이사회를 개최했다. 주요 안건은 500병상 규모를 800병상 규모로 확대하는 것이었다. 근거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진료·기능적 측면에서 500병상
중 특성화센터(270병상)를 제외한 잔여병상(230병상)을 진료과별로 할당하면 10병상 미만으로, 이 규모로는 종합병원의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둘째, 교육·연구적 측면에서 병상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대학병원으로서 인근 종합병원 지원에 필요한 적정병상 규모에도 미달이었다. 셋째, 경영적 측면에서 500병상보다는 800병상이 경제적 효율성이 높은 규모였다. 더욱이 정부로부터 노인병
전문의료시설의 역할뿐 아니라 지역주민과 응급 외상환자를 돌볼 수 있는 종합병원의 기능을 수행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터였다. 앞서 미국 듀크대학교병원 노인병센터와 일본 유수의 대학병원 등을 견학한 후
실태를 분석한 결과도 다르지 않았다. 500병상으로는 모든 면에서 역부족이라는 결론이었다.
결국 기본설계를 800병상의 지하 3층, 지상 15층(연면적 12만 5,620㎡)으로 변경하기로 했다. 진료시설을 확장하고, 병원동과 별도로 파워플랜트와 영안실, 간호기숙사를 건립하기로 했다. 또
병원동의 구조를 본원과 같이 Y자형으로 하여 서울대학교병원이라는 상징성과 정체성을 부여하기로 했다. 규모가 커지고 모든 것을 원점에서 재검토했기 때문에 개원 시기를 종전의 1998년에서 2000년
10월로 연기했다.
이 같은 내용을 반영하여 1996년 3월, 수정을 거친 분당병원 건립종합계획을 발표했다. 핵심은 ‘800병상(노인전문센터 300병상, 일반병상 500병상), 23개 진료과를 갖추고 하루 평균
1,800명의 외래진료 능력을 갖춘 병원’을 건립하는 것이었다.
노인성 질환 중 유병률이 높고 중요성이 큰 뇌신경, 심장, 폐, 관절, 재활 5개 분야를 전담하는 특성화센터를 설치하여 노인의료에 대한 체계적인 국가중앙센터로서의 기능과 함께 지역주민을 위한 일반
종합병원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기로 했다. 서울대학교병원과 분당병원이 역할을 분담하여 중점 육성분야의 중복과 낭비 요인도 없애기로 했다. 본원은 소아·치과를 비롯해 암, 장기이식, 혈액·종양, 감염,
알레르기 분야의 전문 3차 진료기관으로 육성하고, 분당병원은 성인병 및 노인전문병원으로서 노인병의 3차 진료기능과 함께 지역 병·의원과 연계한 개방형 병원으로 육성하기로 했다.
이러한 기본 계획을 바탕으로 수십 차례의 실무협의를 거쳐 1996년 7월 기본설계도를 완성 했다. 외래환자 중심으로 진료 공간을 배치하고 대기공간과 통과공간을 분리하여 동선 체계를 원활하게
조율했다. 건물의 유지보수, 쾌적한 실내 환경과 효용성 증대를 위해 IBS를 구축하고, 교수·의사실을 각 병동 층에 배치하여 환자의 진료 접근도를 높였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분당병원
건립추진본부는 사전에 전 진료과를 대상으로 설계제안서를 받으며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또 각 대학의 건축공학과 교수로 구성된 자문위원을 위촉하여 전문가적인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서울대학교병원이 한 세기 넘게 쌓아온 노하우를 반영하려는 의도였다.
1996년 3월 27일 분당병원의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드디어 병원 건립의 첫 삽을 뜬 것이다. 사업규모는 부지면적 12만 661㎡(3만 6,500평), 연면적 13만 5,573㎡(4만
1,011평), 800병상의 규모였다. 공사 현장인 불곡산 기슭에서 열린 기공식에는 김영삼 대통령 내외를 비롯하여 안병영 교육부 장관, 김양배 보건복지부 장관, 이인제 경기도지사, 오성수 성남시장
등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 인사 50여 명을 비롯해 선우중호 서울대학교 총장과 이순형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장, 김광남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장, 이영우 서울대학교병원장 등 관련 기관장 및 의료계 인사
500여 명이 참석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축사를 통해 “우리나라에 처음 세워지는 노인전문병원 분당병원이 노인의학의 연구와 노인병 전문 인력 양성의 중심이 되어 우리나라 노인의학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해 달라”고 당부하며 분당병원 탄생에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기공식 다음 날 각 일간지에는 우리나라 첫 노인전문병원의 탄생을 알리는 기사가 일제히 보도되었고, 분당병원의 설립은 전 국민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같은 해 5월에는 분당병원 건립추진본부 설치·운영 규정이 제정, 공포되어 직제가 건립추진본부 체제에서 건립본부 체제로 변경되었다. 건립추진본부의 기획기능에 더하여 집행기능을 부여하며 건립본부가 병원
건립을 총괄하도록 한 것이다.
10월에는 병원 건축허가 신청서를 접수하여 정식으로 건축허가를 받았다. 수도권정비계획법 개정이 늦어지면서 기공식을 하고도 착공하지 못해 애태웠던 시간을 뒤로 포클레인의 우렁찬 굉음과 함께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처럼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으며,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모두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발휘하며 해결해 나갔다. 어떤 어려움도 병원 건립에 대한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분당병원 건립은 지역주민은 물론, 국민과의 약속이었다. 그때만 해도 이제 더 이상 아무런 문제없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곧 병원이 세워질 것이라 모두가 믿었다.
1996.03.27 분당서울대학교병원 기공식
1997년 12월 IMF 외환위기가 대한민국을 강타했다. 기업들이 도산하고 직업을 잃은 가장들이 연일 거리로 쏟아졌으며 환율이 솟구쳤다. 국가 부도라는 자극적인 말이 난무하고 사회 모든 분야에 일대
혼란이 일었다.
분당병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병원 건립공사에 참여한 일부 건설사가 도산하여 터파기 공사와 골조 공사를 마무리하고도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 채 공사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자금 확보에도 비상이
걸렸다. 서울대학교병원은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사단법인 산업정책연구원과 재원조달방안 연구용역을 체결하고 기금조성 방안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으나 이마저 중단해야 했다. 병원 건립으로 책정된 예산은
정부 출연금 및 재정투·융자금 3,174억 원과 자체자금 1,107억 원이었는데, 기금조성 활동이 중단되면서 병원 건립사업의 지속성을 보장할 수 없었다. 분당병원 건립본부 내에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공사 범위를 축소해서라도 2000년 개원에 맞추자는 의견과 기간을 연장하여 계획한 설계대로 추진하자는 의견이 팽팽했다.
2000년 개원에 맞춰 원안대로 공사를 진행하려면 연간 1,200억 원을 투입해야 하고 정부지원금도 연간 670억 원 이상 지원받아야 하는데 양쪽 모두 그럴 여력이 없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준공 시기를 2002년 12월로 연장했으며, 건립계획도 대폭 수정했다. 꼭 필요한 병동과 파워플랜트 시설은 예정대로 건립하고, 간호기숙사와 영안실은 단계별로 시행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상황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외환위기의 영향으로 장기불황이 이어지고 물가가 폭등하며 건축공사비와 의료장비 등 투자비의 증액이 불가피했다.
분당병원 건립본부는 예산을 줄이기 위해 공사 우선순위를 정해 분리발주하고, 목표액을 설정하여 비용을 절감했다. 공사기간을 준수하기 위해 새벽부터 일하고 철야작업도 감수했다. 덕분에 1998년 9월
상량식을 거행하며 준공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었다.
이처럼 분당병원 건립본부는 ‘시련은 있어도 중단과 포기는 있을 수 없다’는 각오로 외환위기라는 어려움을 정면으로 돌파해 나갔다.
1996.10.14 터파기 공사 안전기원제
1998.05.14 골조 공사 모습
1998.09.10 분당서울대학교병원 상량식
1999년 5월 6일 분원의 공식 명칭이 ‘분당서울대학교병원’으로 확정되었다. 이전까지 가칭 분당병원으로 불리다 비로소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국내 최고 브랜드인 서울대학교병원과 통일성을 부여하여 제2의 서울대학교병원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고, 동시에 병원이 위치한 지역을 강조하여 독립성을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다. 같은 해 9월 28일에는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분당서울대학교병원 발전후원회’가 출범했다. 초대 회장으로 서울대학교 총장과 정부 요직을 두루 거친 권이혁 당시 성균관대학교 이사장이 위촉되었다.
IMF 외환위기의 여파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정부 예산 지원은 부족했고 병원 자체 자금 조달도 한계가 있었다. 건립 예산 확보가 절실했다. 이에 사회 각계각층의 영향력 있는 인물로 후원회를 구성하고
모금활동을 시작했다.
국가나 기업이나 가정이나 모두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분당서울대학교병원이 사회기반시설로서 반드시 건립되어야 한다는 데 공감한 동문, 교직원, 기업, 일반인 등 뜻있는 개인과 단체에서 후원의 손길을
보내주었다.
2003년까지 각계에서 모금한 지원금은 약 50억 원에 이르러 분당서울대학교병원이 출발하는 데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분당서울대학교병원 발전후원회는 분원의 성공적인 개원을 바라는 모든 이들의 소망과 염원이 모인 결정체였다. 병원은 후원자들의 고귀한 뜻을 받들어 모든 비용을 값지게 사용하고자노력했고, 공기를 지키기
위해 총력을 다했다.
병원 건립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준 분당서울대학교병원 발전후원회는 2004년 12월 발전적 해체를 위한 청산절차를 밟을 때까지 교직원 597명, 외부인사 320명이 참여했다.
해체 후에는 서울대학교병원 발전후원회의 분당지회로 조직을 정비하여 오늘날 발전후원회로 이어졌다.
분당서울대학교병원은 2001년 11월 분당병원 건립본부 조직을 확대하여 개원준비단을 구성했다. 단장으로는 당시 서울대학교병원 부원장으로 재직 중인 성상철 교수가 위촉되었다. 성상철 개원준비단장은
분원 건립 초기부터 참여하여 운영계획을 수립하는 등 건립사업의 밑그림을 그려왔기 때문에 병원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성공적인 개원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사람일 터였다. 먼저 부단장으로 진단방사선과 강흥식 교수를 선임하고, 진료기획처와 사무국을 분리했다.
개원준비단 보직자들은 성공적인 개원을 위해서는 개척자 정신과 패기가 있는 인재를 확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데 공감하고, 의료진과 간호, 행정 등 전방위에 걸쳐 인재 모집에 나섰다. 각 부서
단위로 개원에 필요한 전담인력을 편성하고 해당 분야의 업무에 정통하면서 리더십이 있고 타 직종과 협조할 수 있는 정예요원으로 개원준비단을 구성하고자 했다. 곧 진료팀을 구성할 역량 있는 32명의
교수요원이 선정되었다.
개원준비단은 먼저 ‘성인병 및 노인성 질환에 대한 국가중심병원의 역할 수행과 수도권 지역주민의 종합의료 서비스 제공’이라는 병원의 기본 운영 방침을 모두가 공유하도록 했다. 개원 준비 단계에서
병원의 성격을 명확히 하여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기 위함이었다. 또한 기획위원회, 의료장비 및 기자재 도입위원회, 의료정보위원회, 진료준비위원회, 홍보위원회 등 분야별
소위원회를 구성하고 의사 결정 권한을 위임하여 책임 있게 개원 업무를 추진하도록 했다.
특히 분당서울대학교병원의 조직 및 인사체계에 대한 외부 전문기관 용역 결과를 토대로 서울대학교병원과의 협력 조직체계이자 자율적 독립경영 단위체계의 수익성을 갖춘 공공병원으로 설계했다. 그리고
21세기 첨단병원으로서 디지털 시스템을 구축하기로 했다.
분당서울대학교병원은 건축공사가 한창이던 1997년 전산화 구축 방향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본원이 운용하고 있던 전산시스템을 적용할 방침이었다. 당시 서울대학교병원은 1993년 도입한
의료시스템을 운용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IT 환경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새로운 개발이나 환경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참고할 모델이 없었다. 우리나라는 IT 강국이라 불릴 정도로 정보화 혁명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예외적으로 의료계의 정보화는 걸음마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한두 개의 대형병원이
전산화를 구축한 정도였고, 그나마도 진료기록을 메모하는 수준이었다. 해외도 마찬가지였다. 각국에서도 중소병원 일부에서 기초적인 수준의 전자의무기록을 구현했을 뿐 대형병원의 경우 선례가 없었다.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고 신생병원에 거는 국민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한발 앞선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와중에 IMF 외환위기가 발발하면서 개원 시기가 연기되었고, 이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원점에서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1999년 겨울, 의료정보시스템의 도입을 재차 검토했다. 이때 아예 새로운 환경에 적합한 맞춤형 시스템을 개발하기로 방향을 선회했다. 시스템 개발에 드는 노력과 비용, 촉박한 개발 기간 등을 고려해
외국 선진기업의 프로그램을 수입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의료제도나 보험제도가 다를 뿐 아니라 국내 의료환경과 현장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국내 최고의 병원으로서 자존심도
허락하지 않았다.
분당서울대학교병원은 우리나라 의료환경에 최적화되고, 각각의 필수 기능들이 100% 디지털로 통합된 시스템을 독자적으로 개발하기로 했다. 실로 모험이자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신생병원이어서 개발에
유리한 기회이기도 했다. 오래된 병원이 의료정보시스템을 도입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기존 기록을 정리하는 데 드는 막대한 시간과 인력, 그리고 비용이었다. 그런 면에서 분당서울대학교병원은 정리할
기존 기록이 없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 비용과 기간조차 가늠하기 어려웠고 의견이 분분했다. 그런 가운데에도 선진화된 병원을 만들고자 하는 구성원들의 열망이 컸다. 모두가 자체적인 첨단의료정보시스템을 개발하는 데
힘을 보태기로 했다. 분당에서 먼저 구축하고, 이후 본원에 이식한다는 복안이었다. 분당서울대학교병원은 한국 의료계 역사상 단 한 번도 시도되지 않은 ‘병원 전체가 통합의료정보시스템으로 움직이는
100% 디지털병원’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실행에 나섰다. 의료정보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e-Hospital 구축’이야말로 진정한 환자 중심의 병원이라고 판단했다.
불필요한 인적·시간적 낭비를 최소화하는 첨단 진료 시스템이 한국 의료계에 발을 딛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도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했다.
분당서울대학교병원이 구현하려는 병원은 처방전달시스템(Order Communication System, OCS), 의료영상정보시스템(Picture Archiving Communication
System, PACS), 전자의무기록(Electronic Medical Recording, EMR) 등이 완비되어 4Less가 가능한 100% 디지털병원이었다. 4Less는
‘슬립(Slipless), 필름(Filmless), 종이(Paperless), 차트(Chartless)’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중에서도 차트에 집중했다. 슬립, 필름, 종이 없는 병원은 일부 있어도
차트 없는 병원은 전무했다.
분당서울대학교병원은 디지털병원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전자의무기록(EMR) 개발을 위해 전문인력으로 TFT를 꾸렸다. 2002년 2월에는 ‘의무기록의 작성, 보관, 조회 및 환자와 관련된 정보교환을
쉽고 빠르고 정확하게 한다’는 내용의 EMR 개발 목표를 공유하고 본격적인 작업에 돌입했다.
4Less를 구현한 전자의무기록을 하나의 통합된 시스템으로 연동시켜야 한다는 부담감은 컸다. 예상하지 못한 문제에 부딪힐 때면 본원에서 사용하는 시스템을 도입한 후 시간을 두고 EMR을 개발하자거나
종이차트와 병행하자는 회의론이 불거지기도 했다. 그때마다 한국 의료계의 역사를 새로 쓰겠다는 초심으로 돌아가 서로를 북돋고 의지를 새로이 다졌다. 의사들도 나섰다. 하드웨어 개발은 전산 전문가들의
영역이지만, 시스템을 사용하는 당사자는 의료진이다.
진료 현장을 모르는 전산 전문가에게 전적으로 맡길 것이 아니라, 진료 현장을 가장 잘 아는 의료진이 개발 단계부터 참여하여 현장을 온전히 반영해야 최적화된 시스템을 개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개원이 늦춰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정대로 개원하고 진료가 시작됐다면 바쁜 일정으로 엄두를 내지 못했을 텐데, 개원이 미뤄지면서 진료의 부담 없이 시스템 개발에 시간과 노력을 쏟을 수 있었다. 개발 전문가와 의사들은 국제 표준
의료용어에 따라 맞춤형 차트를 만들어 나갔다.
2002년 12월에는 디지털병원 구축 프로젝트를 함께 할 사업자로 이지케어텍과 한국IBM을 선정했다. 한국IBM이 서버와 티볼리 소프트웨어를,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분사한 의료솔루션 전문업체
이지케어텍이 의료장비 관련 솔루션을 담당했다.
초기 EMR 개발팀은 15명의 의사와 50여 명의 전산 전문가로 구성되었다가 2003년 1월에는 50여 명의 의사가 참여하여 문제점을 일일이 바로잡고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데 힘을 보탰다. 그
결과 전 세계 어디서도 바로 사용 가능한 국제 표준의 의료정보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다.
개원을 앞두고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는 의료장비 도입이었다. 주어진 예산 내에서 국내 최고 수준의 장비를 엄선해야 했다. 2002년 2월 의료장비 및 기자재 도입위원회를 구성하고 1차 모임을
개최했다.
각 진료부서에서 신청한 장비 목록과 수량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의료기기에 배정된 예산이 414억 원인데 각 부서가 신청한 장비는 4,100여 종 1,170억 원으로 예산의 3배나
되었다. 10억 원이 넘는 고가의 장비도 여러 대였다. 단순히 비용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여러 과에서 같은 장비를 신청하기도 했는데, 진료과의 특성과 선호도에 따라 같은 장비라도 모델이나 기종이
달랐다. 난항이 예상되었다. 위원회는 먼저 의료장비의 선정 및 구매 원칙을 정했다. 수많은 이의 제기와 재조정을 거쳤음은 물론이었다.
비용 절감을 위한 아이디어도 쏟아졌다. 고가의 대형장비는 일괄 입찰 경쟁을 유도하여 최저 가격에 구매하고, 공동으로 사용하는 장비는 전용공간을 만들어 수량을 조정했다. 장비의 무상임차 방식도 비용
절감을 위한 돌파구였다. 예컨대 소모품과 시약의 경우 장비에 매칭된 제품을 쓰기 마련인데 발상을 전환하여 소모품과 시약을 쓰되 장비를 무상으로 임차하기도 하고, 산학협동 수익배분 방법으로 도입하기도
했다. 고가 대형장비의 경우 통상 2년인 무상하자 보증기간을 5년으로 늘린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였다. 분당서울대학교병원은 2002년한 해 동안 무려 52차례나 회의를 진행할 정도로 장비 도입에
심혈을 기울였다. 무엇보다도 EMR과 PACS에 연동하는 장비를 찾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당시는 대형회사의 일부 장비에만 EMR에 연동이 가능한 데이터 아웃풋 프로토콜과 터미널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성능이 우수하고 가격이 합리적이어도 EMR과 PACS와 연동되지 않으면 구매 대상에서 제외할 수밖에 없었다. 일부 업체들이 불만을 드러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EMR 연동 문제로 입찰 참여 기회조차 얻지 못했으니 당연했다. 그런데도 장비를 납품하려는 장비업체들의 경쟁이 치열했다. 제조사 개발책임자가 EMR 연동을 수행한다고 사인한
‘EMR 연동 장비 납품 예정 확약서’를 스펙에 포함하여 입찰에 참여하는 업체가 생겨날 정도였다. 이처럼 분당서울대학교병원은 100% 디지털병원을 목표로 모든 장비를 디지털 제품으로 선택했다.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고 사용자들도 익숙하지 않았지만, 국내 의료시스템을 선도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분당서울대학교병원이 사용한 디지털 장비는 이후 디지털화를 추진하는 병원들마다 앞다퉈 도입했고, 우리나라 의료장비 산업이 한 단계 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과 과감한 추진력으로
아무도 하지 않은 길을 개척한 노력의 결과였다.
병원이 의료기관으로서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고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었다. 분당서울대학교병원은 이를 깊이 인식하고 진취적이고 역량 있는 인재를 채용하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정했다. 그리고 단계별 개원 계획에 맞춰 인력 규모, 채용 시기와 방법 등을 정한 인력확보 기본계획안을 수립했다.
먼저 본원에서 경험과 연륜을 쌓은 시니어 스텝을 각 진료과별로 포진시켰다. 기대가 큰 만큼 우려도 있었다. 안정된 연구 환경과 정년이 보장된 최고의 병원을 떠나 무엇 하나 갖춰지지 않은 신생병원을
택할 의료진이 있을까? 게다가 교통도 좋지 않았다. 서울에서 병원까지 출·퇴근하려면 두 시간이 넘었다. 선택을 강요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기득권을 내려놓고 불확실한 미래와 불편을 감수한 의료진이 모이기 시작했다. 안락함보다 새로운 도전에 나선 개척자들이었다. 그들에게는 대형 종합병원을 설립해 본 경험은 없었지만, 못할 이유가 없다는
의지가 있었다. 시련이야 극복하면 된다는 열정이 가득했고, 매사에 능동적으로 임했다. 자발성이 주는 강력한 힘이었다.
2002년 4월에는 인사보수체계 용역 결과를 토대로 인재상과 채용방침, 채용규모 등을 결정했다. 우선 본원 직원을 대상으로 이동·전환할 예정자를 공개 채용 방식으로 선발했다. 파트장급 직원은
관리능력, 경력직원은 실무능력을 검증하여 선발한다는 기본원칙 아래 자격요건과 핵심역량, 근무성적 등을 엄격하게 반영하여 심사했다. 모두 230명이 지원한 가운데 간호직, 약무직, 사무직, 보건직,
기술직 등 직종별로 159명을 최종 선발했다.
그렇다고 본원 출신으로만 구성한 것은 아니었다. 전국을 돌며 역량 있는 명의를 발굴했다. 선발의 최우선 기준은 실력, 의료진은 물론 조직의 핵심인 기획조정실장, 간호부장 등 주요 보직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서울대학교병원이 다음과 같은 정관을 신설하여 분원의 독립성을 보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장은 분당서울대학교병원의 재산 및 회계 소속 직원의 인사, 보수, 근로조건, 경영권 등 분당서울대학교병원 운영 관리에 관한 일체를 독립적으로 관장할 수
있도록 분당서울대학교병원장에게
위임한다.”(정관, 2002. 1. 21 신설)
덕분에 분당서울대학교병원은 새로운 조직을 구성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본원의 장점인 수준 높은 역량과 효율성을 취하면서도 독립적이고 창의적이며 개방적인 문화를 구축할 수 있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조선일보 1면에 경력 및 신입사원 채용 공고를 게시했다. 경력직원은 276명 모집에 1,645명이 지원하여 9.6 대 1이라는 높은 경쟁률을 보였고, 신입사원도 240명 모집에
551명이 지원했다. 이는 분당서울대학교병원에 거는 국민적 기대와 관심이 얼마나 높은지를 말해주는 방증이었다.
이처럼 분당서울대학교병원의 초기 조직은 본원 출신과 다른 병원에서 경력을 쌓은 실력자와 새로 선발한 신입사원이 한데 섞여 있었다. 서로가 경험해온 것도, 문화도 달랐으나 화합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병원을 성공적으로 개원하고 빨리 안정시켜야 한다는 같은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개원이 가까워지면서 직원들은 야근이 잦았다. 막차가 끊기면 근처 찜질방에서 불편한 쪽잠을 자고 아침이면 출근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나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제자리에서 충실히 제 역할을 다했다.
그들 마음 안에는 주인의식과 자부심, 그리고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2002년 7월 분당서울대학교병원의 초대 병원장으로 성상철 교수가 취임했다. 이후 단계적으로 교직원을 채용하여 조직체계를 갖췄고 최초의 운영규정을 제정했으며 막바지 마감 공사를 진행하는 등 개원을
착실히 준비했다.
2002년 12월 4일, 마침내 역사적인 준공식을 거행했다. 1996년 3월 착공해 6년여 만의 일이었다. 1989년 분원 논의를 시작했으니 실로 13년 만에 결실을 본 것이다.
국민의 관심과 기대 속에서 열린 준공식에는 김대중 대통령과 영부인 이희호 여사를 비롯해 김성호 보건복지부 장관, 정운찬 서울대학교 총장, 박용현 서울대학교병원장 등 각계인사 270여 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IMF 외환위기의 시련을 이겨내고 각고의 노력 끝에 완공한 병원의 탄생을 축하하고 그간의 노고를 치하했다. 분당서울대학교병원 성상철 초대 원장과 임직원들도 기쁜 마음으로 내외빈의 축하를
받았다.
이날 준공식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축사를 통해 분당서울대학교병원 설립의 의미를 되짚고 앞으로 국내 의료 발전을 위해 제 역할을 다해달라고 당부했다.
“이제 우리도 최첨단 시스템을 갖춘 노인전문 종합병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고령화 사회의 노인 의료복지를 위한 새로운 전기가 열렸음을 의미합니다.
국내 노인복지 시설들과 원활히 연계되는 체계를 구축하고 교육·연구·진료 분야에서 국내 의학과 의료기술의 발전을 이끄는 병원으로 성장해 주기를 바랍니다.”
성상철 원장도 기념사를 통해 개원과 동시에 디지털병원의 면모를 갖춰 급변하는 의료환경에 대처하고 국내 의료산업 발전을 선도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설립 목적인 노인병센터를 필두로 5개 특성화센터, 23개 진료과를 갖춘 명실상부한 종합병원으로서 교육·연구와 지역사회의 건강 지킴이 역할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약속했다.
당시 분당서울대학교병원은 대지면적 12만 661㎡(3만 6,500평), 건축 연면적 13만 5,909㎡(4만 1,112평)의 지하 3층, 지상 15층 규모로, 사업비 총 3,100억 원이 투입되었다. 800병상, 하루 3,000명의 외래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진료능력을 갖췄으며 조명, 공기조절, 방재, 보수 등이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스마트한 빌딩으로 지어졌다. 준공까지 건축기자재소위원회가 건축 설비, 전기, 통신공사를 직접 챙겼고, 각 부문의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위원회의 자문을 받았다. 착공 당시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산 18-1번지였던 주소는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300번지로 바뀌었고, 신도시 조성공사로 먼지 날리던 분당은 어느새 40만 명이 거주하는 국내 최대의 신도시로 성장해 있었다.
바야흐로 서울대학교병원 최초의 분원이자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새로운 디지털병원인 분당서울대학교병원의 공식 개원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2003.03.05 개원 직전의 분당서울대학교병원 전경